• 전인적 차원의 생명 옹호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땅과 바다와 하늘과 피조물들을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지구에 거주할 인간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기로 선택하셨다.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니다. 시편 84절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우리도 똑 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거룩하고 장엄하시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이 지으신 작품을 볼 때, 시편 8편의 다윗처럼, 죄악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상하심으로 인해 당혹해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아들을 대가로 치루실 만큼 컸다. 예수님은 그를 믿을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사람들, 즉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상하심과 선하심을 자각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다른 종류의 확신과 불이 지펴진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면(1:27),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만약 예수님이 모든 족속과 언어와 나라의 사람들, 가난한 자, 고아,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이 모든 죄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생명들을 엄청나게 가치 있는 존재로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생명 옹호(pro-life. 원래 이 단어는 종종 낙태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아래의 'anti-abortion'이라는 개념이 따로 나오므로, 이 기사 전체에서 이 단어를 생명 옹호로 번역함- 역자 주) 입장을 고려할 때 반드시 씨름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에 속한다. 생명 옹호는 종종 낙태 반대(anti-abortion)와 만 연결된다. 생명 옹호는 낙태 반대보다 더 좁은 개념이 아니라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생명 옹호 입장은 모든 생명을 포괄한다. 그것은 태아에서 만들어진 아기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단계의 생명의 존엄성도 지지한다(139:13). 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노인들은(20:35; 딤전 5:1~8) 물론이고 고아들과 과부들도(1:27) 기억함을 의미한다. 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자살과 자살 동조에 대한 견해까지도 시사한다. 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생명을 옹호하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22:37~39)는 두 가지 큰 계명 안에 요약되어 있는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소셜 미디어에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 속에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한 예가 있다고 믿는다. 소셜 미디어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면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속으로 나르시스트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나는 거의 매일 그 용어가 언급되는 것을 본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돌을 던지는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모습을 찍어서(“셀피”) 그것을 SNS에 올리면, 당신은 나르시스트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 대해 무언가라도 올린다면, 당신은 나르시스트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나르시스트라고 믿는다면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 비록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좋거나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이 냉소자들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의 말에서 빠진 고리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모두 나르시스트라는 점일 것이다. 나는 주님이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큰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복음은 죽어가는 세상에 좋은 소식이다. 내가 나의 죄 가운데서 앞을 보지 못하고 걸으며 영원한 저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한 것이 그 소식이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은 구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일단 내가 구원 받고 살아 있는 한(여기에서 그리고 영원히),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한 혜택들을 계속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구주를 얼굴을 직접 맞대고 뵙는 날까지, 또한 그토록 밀착되어 있는 죄가 영원히 파멸되는 날까지, 나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까지, 나는 나와 같은 다른 죄인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며, 우리 역시 그분의 피를 통해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보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 보화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고무시킨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초로 하여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다(요일 3:16).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긍휼을 더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아버지의 진노를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다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정당하게 속한 은혜의 보좌에 대한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으셨다. 반대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2:6~7).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으며, 그분의 놀라운 희생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료 형제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형제들과 자매들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에 대해 혼동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 심지어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는 도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회중 가운데 있는 90세의 할머니, 자폐증이 있어서 제멋대로 행동하며 즐거워하는 아이, 그리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적대적인 불신 이웃 등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을 제시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다.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필요와 자신이 선호하는 것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몸과 유익에 대해서마저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보이는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표시다. , 이 사랑을 통해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13:34~35). 우리가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지 않으면 도외시되거나 잊힐 수 있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이와 같은 희생적인 사랑은, 복음에 대한 공개적인 초청장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의 본보기로서 바라보아야 하며, 사랑할 힘을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 바짝 붙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랑에 대해 이토록 많이 말하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사랑이 없이는 진정으로 생명을 옹호하는 사람일 수 없다. 무기력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는 것, 예컨대, 과부와 고아를 무시하거나 노인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이기심과 자아-몰입과 동일한 자세이며 결코 사랑이 아니다. 전인적인 생명 옹호의 입장은 두 번째 계명을 인정하고 그것을 굳게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13:10).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 옹호의 확신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생명 옹호를 말로만 하고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으려는 유혹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실천적으로 말해서, 이웃에 대한 생명 옹호의 사랑은 영적이고(기도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섬김을 통해). 기도는 덜 중요한 행동이 아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으며, 기도는 우리의 창조주와 의사소통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노인, 장애인,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능력 있게 역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국가 정책의 변화를 위해 그리고 선거로 뽑은 공직자들의 겸손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기도 외에도,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실천적인 단계를 밟을 수 있고, 또한 고아, 장애인, 위기에 처한 임산부, 그리고 노인들을 섬기기 위해 조직된 기관들과 공동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천적인 일은 우리의 지역 회중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들, 죄나 유혹과 씨름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알아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주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고 생명 옹호의 확신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제작: 매일배움, 번역: 김장복

이 글의 원문은 리고니어 선교회의 웹사이트 www.ligonier.org에 게시되어 있으며 이 글은 리고니어 선교회의 허락 하에 번역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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