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참된 용기를 보려는 자, 그를 여기로 오게 하라.

여기서 그는 일관된 길을 갈 것이다.

바람이여 오라. 비바람이여 오라.

순례자가 되려 한 그의 초심을

누그러뜨리는 낙심은 없을 것이다.

 

반 세기 전에, 나는 랄프 보간 윌리엄스가 작곡한 음악에 맞춰서 학교 모임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가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제2부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용맹씨의 대사 부분에 나온다. 그 전에, 용맹씨는 강심장씨와 그의 동료들에게 나는 순례자이며, 천성으로 가고 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성으로 나아가는 순례자들이다. 위의 문구에서 번연은 단순히 그가 사랑한 성경 내용을 반영하고 있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순례자라는 사실을 확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전형적인 언약에서, 가나안을 네가 거류하는 이 땅이라고 약속하셨다(17:8). 그리고 베드로는 신약에서, 자신의 독자들에게 흩어진 나그네라고 묘사할 때 똑같은 개념을 반영한다(벧전 1:1. 117절의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참조하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역사의 신실한 신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칭한다(11:13).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유쾌한 여정, 여행길이다. 그것에는 시작점과 종점이 있다. 그것은 움직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장소에서 너무 오래 동안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도”(the Way)를 따르는 자들로서 칭해졌다. 이는 그들이 다른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음을 나타낸다(9:2; 24:14).

 

여기서 몇몇 개념들이 떠오른다. 첫째, 모험 개념이 있다. 그렇다. 모험이다. 만약 호빗(반지의 제왕의 제1- 역자 주)에서 빌보 배긴스가 셔(Shire)에서의 틀에 박힌 삶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 모험을 피했다면, 그는 나중에 호빗의 부제인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에 나오는 숨 막힐 듯한 모험담에서의 비상한 여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다소 다른 여정인 여기에서 거기로”(이 땅에서부터 천성까지) 여정을 진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용맹과 위험의 일화들로 가득한 똑같이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흥미진진한 그 무엇이 있다. 매사에 하나님의 새로운 공급과 개입과 구원이 기다린다. 우리는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27:1),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주인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곳이 쉴 만한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이든지, 아니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들의 목전일지라도 마찬가지다(23).

 

나의 친구이자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나의 선임자이며 <테이블톡>의 독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사람인 싱클레어 퍼거슨은 종종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도인인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라는 환호로 마치곤 했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길의 매 순간이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둘째, 순례는 이생의 일시성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4).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고후 4:18). 이생을 일시적이라 지칭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답은 신약성경에 보이는, “지금아직 아닌사이의 긴장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세를살아가는 사람들이다(고전 10:11). 내세의 어떤 것이 시공간의 존재를 이미 침투해 들어왔으며, 우리는 또 다른 영역의 시민들이 되었다(3:20).

 

이 관점은 근본적인 긴장을 일으킨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서 다양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은거와 금욕의 은둔 생활은 성경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이 이상한 인생관은 AD 423년에 시리아에서 기둥에 올라가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그 기둥에서 살았다는 주상 고행자 시므온 장로의 삶에서 희화화되었다. 이것은 기독교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재형성한다. 그들은 어두운 곳의 빛이다. 다른 모든 것을 보잘 것 없고 진부해 보이게 만드는 새로운 열정이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는다. 토마스 챌머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새로운 열정의 분출력에 의해 점화된다.

 

순례의 세 번째 측면은 방향, 목표, 종점에 대한 감각이다. 여정에는 목적지가 있다. 기독교는 온전함과 완전함의 의미를 지닌 샬롬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안다. 목적이 없고 표류하는 모습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주목한다”(고후 4:18. “주목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강렬하며 지속적인 응시를 암시한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인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 영광이 기다리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순례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한결같으면서도 단호한 훈련을 계속한다. 앞에 놓인 것은 우리의 비전을 채우고, 우리더러 무언가를 계속 기대하게 한다. 한결같은 순례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기대와 설명을 넘어선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말과 그의 소년에는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니아와 북쪽까지!”라는 문구가 있다. 십자가의 모든 순례자들은 이 문구에 동의한다. 앞으로 그리고 위로!



제작: 매일배움, 번역: 김장복

이 글의 원문은 리고니어 선교회의 웹사이트 www.ligonier.org에 게시되어 있으며 이 글은 리고니어 선교회의 허락 하에 번역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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